월요일, 12월 19, 2022

[HAM] 1921년 12월,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 성공 100주년

[HAM] 1921년 12월,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 성공 100주년

영어공부 삼아 가끔 듣는 유튜브 채널의 2022년 12월 21일자 Amateur Radio Newsline headlines for Ham Nation 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더군요.

첫번째 꼭지 기사는 커네티컷의 고전 무전기 박물관 소식인데 1921년 대서양횡단 무선통신 성공 기념을 다루고 있습니다.

1921년에서 1924년까지 아마추어 무선사들의 실험정신으로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이 성공했다. 그 이후 대서양뿐만 아니라 태평양 횡단 통신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때 사용된 주파수는 200미터 에서 100미터 밴드였다. 대양횡단 통신이 성공하자 단파대 무선통신의 효용성이 높이 평가받았다. 이 시절 아마추어 무선사들의 실험은 계속 이어 졌고 오늘날 무선통신의 토대가 되었다. [The Transatlantic Tests, May 2014 QST]

두번째 꼭지 기사는 조난당한 아마추어 무선사의 구조소식. 휴대전화가 꺼졌지만 다행히 DMR이 되는 휴대 무전기를 가지고 있어서 구조됐답니다. 그와 교신한 지역햄이 중계기를 통해 조난을 신고하고 소방대에서 탐색한 끝에 구조할 수 있었답니다.

세번째 꼭지 기사는 미국의 제너럴급 자격시험 문제은행이 내후년부터 개편된다고 하니 볼사람은 내년까지 보라고. 현재 문제은행(question pool)은 2019~2023년까지 유효하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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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꼭지에 해당하는 2014년 5월호 QST의 기사가 재미있어서 옮겨 봅니다.

The Transatlantic Tests

대서양 횡단 통신 실험 [원문: The Transatlantic Tests, May 2014 QST]

From 1921 to 1924, radio amateurs experimented with transmitting across the Atlantic.

1921년에서 1924년까지 아마추어 무선사들의 실험으로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이 성공했다.

Michael Marinaro, WN1M, May 2014 QST

[마이클 마리아노씨는 ARRL의 자원봉사 역사가 라고 합니다.]

Hiram Percy Maxim had editorialized that beyond the relay tests in the US, which took place during the 1910s, the next hurdle was transmitting across the Atlantic.

1910년대에 하이람 퍼시 맥심이 주관한 미국 내에서 중계형식으로 원거리 통신 실험이 진행됐다. 다음 극복대상은 대서양을 건너는 것이었다.

Everyday Engineering magazine organized the first sending test with English amateurs prepared to listen for signals from the US. Upon the magazine’s suspension of publication, the League assumed leadership of the project.

미국에서 보내는 신호를 영국에서 수신을 실험하는 기사가 연일 기술잡지를 장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잡지들은 무선연맹이 성공으로 이끌거라고 믿고 기사 출고를 기다렸다.

The test was scheduled for the nights of February 1, 3, and 5 of 1921. Twenty-five almost entirely east coast stations, including 1AW and 2RK, were selected to transmit designated signals at designated times on 200 meters. This test was a failure.

1921년 2월 1일과 3일로 실험일자가 잡혔고 스믈다섯개의 대부분 동해 연안의 무선국들이  200미터 밴드(1.3Mhz)에서 약속된 신호를 보내기로 선정됐었다. 무선국 중에는 1AW와 2RK도 있었다. 시험은 실패로 끝났다.

Not one of the US stations was heard by any of the 250 or so enrolled British amateur listeners. The misfortune was attributed to any number of factors: the poor design and sensitivity of the English receiving equipment; harmonics from commercial press stations; interference from a Royal Navy station; the short period of time permitted for individual transmissions, and the fact that most of the transmitting stations were using spark.

250개에 달하는 영국의 아마추어 수신국들이 대기했으나 미국의 신호를 들었다는 무선국은 없었다. 이 실패의 요인으로 몇가지가 있었는데 영국쪽 수신장비들의 선택도(selectivity)가 좋지 않았고 지역 상업 무선국들로부터 고조파(harmonics) 혼신장애가 있었고, 영국 해군 무선국들로부터 혼신을 받았을 뿐더러 개별 송신국들에게 할당된 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때의 송신기들은 방전방식이었다.

[상업 무선국들은 중장파를 사용한 단거리 무선 전보전송이 많이 이뤄졌다. 아마추어는 중장파 사용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임. 그래서 단파로 밀려났는데, 200미터 밴드면 단파에 속했다. 송신기 성능이 좋지 않아서 수백 킬로 헤르츠의 상업무선국의 대출력 무전기에서 고조파가 나오면 혼신도 대단했다. 그당시 수신기의 성능이 이런 고조파를 걸러낼 만한 수준이 못됐다. 송신기가 아크 방전식이라 가동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미국측에서 여러 무선국들이 돌아가며 송신을 하기로 했는데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어서 제대로 송신하지 못했다. 아크 방전 송신기는 전기를 많이 먹는다. 대출력 송신하면 온동네 전기가 깜빡일 정도였다고 하니 말다했다. 실험을 위해 한 무선국이 송신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The Second Transatlantic Test

두번째 시도

Undeterred, the League began to plan for a second Transatlantic Test to include what was thought essential — the presence of an American expert, equipped with the most modern receiver available, who would be stationed at the European receiving end.

실패에 굴하지 않고 미국 아마추어 무선연맹은 두번째 실험을 준비하면서 필수 항목를 추가했다. 유럽쪽 수신측에 최신 장비를 갖춘 미국인 전문가를 파견하는 것이었다.

[1차 실험당시 주요 실패 요인으로 유럽측 무선설비들의 수준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The ARRL Board selected receiver circuit designer, Paul F. Godley, 2ZE, for this assignment. Godley was considered “the most expert operator in the practical reception of short wave signals.” The intent was for Godley to augment but not supersede the British listening  effort.

미국 아마추어무선연맹의 이사회는 수신설비 전문가 폴 구들리, 2ZE 를 전문가로 선임했다. 구들리는 "단파신호 수신기를 다룰 최고의 전문가"라는 평을 가지고 있었다. 구들리를 파견하는 목적은 유럽 사람들을 돕는 것이지 영국의 수신 역활을 대체하려는게 아니었다.

[상대를 무시하지 않으려는 아마추어 무선사의 선의가 엿보임.]

During the preliminary distance trials, held in November, 27 stations qualified as finalists, and were each assigned a group of sealed letters and specific and rotating transmission times during the period of 9:30 PM to 1:00 AM EST each of the 10 consecutive days from December 7 to December 16.

그해 11월에 원거리 통신 실험을 진행하면서 27개의 무선국이 최종 실험 참가자로 뽑혔고 오후 9시 30분무터 이튼날 오전 10시까지 돌아가며 봉인된 글자들을 전송하기로 했다. 실험은 12월 6일부터 17일까지 열흘간 매일 진행됐다.

[여러 무선국이 아무 글자나 전송하지 않도록 무선국마다 송신할 글자들을 봉투에 봉인한 채 가지고 있었다. 미리 전송할 내용을 알려지지 않아야 실험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기도 하니까.]

Non-qualifying stations were encouraged to transmit from 7:00 PM to 9:30 PM EST each evening during rotating 15-minute segments by district. The rest of the US amateurs were asked to remain silent.

비공식 무선국들은 지역마다 15분간 나눠서 오후 7시부터 9시 30분까지 전송하도록 권장됐다. 나머지 미국내 무선국들은 무선침묵을 요청받았다.

Meanwhile, in a field in Ardrossan, Scotland, located southwest of Glasgow, Paul F. Godley was joined by the District Inspector for the Marconi Company, D.E. Pearson. The two  attempted to keep out of the driving wind and rain by sheltering themselves — and their equipment — in a tent. This rough listening post was comprised of a (superheterodyne and regenerative) receiver, a 1300-foot Beverage antenna suspended 12 feet above ground, batteries, and auxiliary equipment. [Godley detailed this trip in his “Official Report of the Second Transatlantic Tests,” which appeared in the February 1922 issue of QST. — Ed.]

글래스고우의 남서쪽에 위치한 스코틀랜드의 안드로산 현지에서 폴 구들리가 마르코니사의 지역 책임자, 피어슨 씨와 합류했다. 비바람 속에서 텐트를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 험난한 환경의 수신국은 수퍼헤테로다인 수신기와 재생식 수신기를 갖췄고 길이 1천 3백피트(약 396 미터) 높이 12피트(3.6미터)의 비버리지 안테나, 배터리 그리고 기타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When the official starting time arrived, the receiving apparatus had been fine-tuned and an identifiable spark signal from 1AAW was distinctly heard, but only briefly and not in test format. This, the first signal to traverse the Atlantic (albeit unofficially) was determined to be that of a pirate in the Boston area. The duo continued to listen on the subsequent mornings of December 8 and 9, to no avail.

약속된 시간이 되자 만반의 준비를 마친 수신설비에서 1AAW 로부터 보내오는 아크 방전 신호를 확연히 알아들 수 있었다. 하지만 잠깐 이었고 약속된 신호는 아니었다. 첫번째 대서양을 건넌(비공식 확인않됨) 신호는 보스턴 지역에서 보내온 해적 신호일거라고 판명됐다. 다음날도 두사람은 12월 8일과 9일 아침에도 기다렸지만 소용 없었다.

[방해하는 인간은 시대를 막론하고 어디든 있다.]

On the morning of the 10th, the CW signals of official entry 1BCG were solidly heard on 230 to 235 meters. This signal derived from the specially designed and constructed station of the Radio Club of America at Greenwich, Connecticut — the only station heard that morning.

10일 아침에 1BCG로부터 온 CW 신호가 230미터와 250미터에서 선명히 잡혔다. 이 신호는 코네티컷 주, 그린위치의 미국 무선클럽에게 특별히 할당된 신호였다. 그날 아침에 수신한 유일한 신호였다.

During the nights and early mornings that followed, until the end of the test, eight spark and 18 CW stations were heard. Eight English amateurs heard eight stations, including 2FP first and five listeners logging 1BCG, all CW; a Dutch amateur heard 1BCG. Surprisingly, many of the stations that qualified in the preliminary tests were not heard in Europe. Conspicuously, CW won the day, landing the final blow to the demise of spark.

공식 실험이 끝난 그날 밤과 이튼날 아침에 여덟국의 스파크 신호와 18개의 CW 무선국 신호가 들렸다. 여덟개의 영국 아마추어 무선국, 2FP를 필두로 여섯의 수신국이 1BCG 의 신호를 수신했다고 보고했다. 모두 CW 신호였다. 한 덴마크 무선국도 1BCG의 신호를 들었다고 했다. 놀랍게도 이전의 실험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많은 무선국들이 유럽에서 들을 수 없었다. 확실히 CW 가 이날의 승자였다. 스파크(방전방식 송신기)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린 셈이었다.

[1차실험의 송신국은 전부 아크 방식이었다. 2차실험은 아크 방전식과 CW 송신이 있었다. CW 송신은 발진기에서 생성된 전파를 이용한 송신이다. 본격적으로 단파와 전신의 시대가 됐다.]

The next Transatlantic Test, scheduled for December 1922, was again a listening test but now with the second half of the event devoted to North American amateurs listening for British and French stations.

다음 대서양 횡단 실험은 1922년 12월로 예정됐다. 여전히 수신 실험이었으나 이번에는 미국 측에서도 영국과 프랑스의 신호를 듣도록 했다.

[앞선 실험은 양방향 통신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송신하고 유럽에서는 듣기만 했다.] 

The ARRL Operating Department was the leader of this complicated program. The Wireless Society of London and a French committee of their three leading societies along with Swiss and Dutch participation conducted activities in their respective countries. Other unique features of this test were the use of Greenwich Mean Time as the recording standard and the broadcasting of results daily by RCA long wave commercial stations on both sides.

미국 아마추어 무선연맹의 운영부는 이 복잡한 프로그램을 진두지휘 했다. 영국의 무선협회와 프랑스의 세 협회중 가장큰 위원회가 스위스와 덴마크의 무선단체에서 참여자들을 규합했다. 이 실험의 또다른 목적으로는 그린위치 표준시를 통신기록에 사용할 수 있는지 RCA에서 장파로 매일 송출하는 상업방송을 미국과 유럽 양측에서 동시에 기록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장파도 빛의 속도에 가깝게 전달되는 전파다. 하지만 그때는 확신이 없었나보다.]

The 20-day test was divided into two 10-day transmitting periods. The first period, December 12 to 21, was for signals from the US to Europe and the second for signals from Europe to the US. Each US morning (midnight GMT onward) was divided into the first 2-1/2 hours for non-qualified, “freefor-all” stations rotated by district and the remaining 3-1/2 hours for qualifiers. The 324 US and Canadian stations that qualified were assigned transmitting times and individual codes to transmit and similar procedures were set down by the Europeans.

20일간으로 예정된 실험은 송신 기간을 10일씩 나눴다. 첫번째 기간은 12월 12일에서 21일 사이로 미국에서 유럽으로 송신, 나머지 열흘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송신하기로 했다. 매일 아침(GMT로는 한밤중 0시)에 먼저 2시간 반동안 비공식 시간으로 뒀는데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누구에게나 개방했고 그후 3시간 반동안은 공식 무선국만 송신하기로 했다. 324개의 미국과 캐나다 무선국들이 공식 무선국으로 선정되어 각자 전송할 부호를 할당 받았다. 비슷한 절차가 유럽에서도 시행 됐다.

The US and Canadian results were striking, though the European results were lackluster. 315 different North American stations from all nine districts and Canada were heard in Europe, 85 of which were heard in the British Isles as well as on the Continent. In the reverse, 20 American reporters heard only two British stations (the specially constructed 5WS in London and 2FZ in Manchester) and one French station (8AB in Nice).

유럽의 결과는 실망스러웠지만 미국과 캐나다의 결과는 놀라웠다. [lackluster: 썩은 동태눈알/미국의 기술력 자랑이라니.] 미국내 아홉개 전지역과 캐나다의 315개의 북미 무선국들의 신호가 유럽에서 들렸다. 85개 무선국의 신호가 유럽대륙은 물론 영국제도(먼바다에 있는 영국령 섬)에서도 들렸다. 역으로 20개의 미국 무선국만이 영국의 2개 송신국의 신호를 들었다고 보고했다. 두 무선국은 특별히 구성한 런던의 5WS와 맨체스터의 2FX 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니스의 8AB 었다.

[미국과 유럽의 송신설비 수준차가 있었다.]

Further Tests

더많은 실험

Two major international tests were conducted during the later part of 1923. In October, a transpacific one-way test with amateur listeners in Australia ultimately reported hearing upwards of 150 stations from the US and Canada. Stations as far east as the 3rd and 2nd districts were logged by the Melbourne receivers.

1923년 후반에 이르러 두개의 중요한 실험이 실시됐다. 10월에 태평양 횡단 일방 실험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호주의 수신국이 150개의 미국과캐나다의 무선국 신호를 수신했다고 보고했다. 3지역과 2지역의 동부 무선국들도 멜버른에서 수신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미국의 아마추어 무선 지역 지도: https://www.dxzone.com/dx19598/arrl-us-call-district-map.jpg]

This listening test was succeeded by the fourth Transatlantic Test which ran from December 21, 1923 through January 10, 1924. This was strictly an east to west affair — initially North American stations were to listen only. The test period was divided into three one-way transmitting periods: European free-for-all, French designated individual, and English designated individual. Innovatively, the day after the listening periods, January 11, was devoted to attempts at two-way transatlantic communications. The test results evidenced that the Europeans had improved their previous test performance with 42 stations, including four in Holland, which were now received by 100 North American amateurs.

수신실험은 1923년 12월 21일부터 1924년 1월까지, 10일 동안 치뤄진 4차 대서양 횡단 실험에 이어 실시됐다. 이 실험은 동부에서 서부까지 관통하는 시도였는데 처음에 북미 무선국들은 수신만 했었다. 실험기간 동안 세 기간으로 나눠 일방통신이 이뤄졌다. 모든 유럽 국들이 자유로이 참여한 송신 기간, 영국 개인 무선국들의 참여하는 송신기간 그리고 프랑스 개인 무선국들의 참여하는 송신기간이 있었다. 북미 무선국들이 수신하는 기간이 끝난 다음날인 1월 11일에는 획기적으로 대서양 횡단 양방향 통신 시도가 있었다. 실험결과 4개의 네델란드 무선국을 포함해 42개 무선국들의 신호를 100개의 북미 아마추어 무선국들에 의해 수신됨으로써 유럽 무선국들의 능력이 향상됐음을 보여줬다.

The two-way segment was encouraged by two record contacts which had been made while the event was being planned. The first two-way transatlantic contact was accomplished by Connecticut’s 1MO and 1XAM and France’s 8AB on November 17, 1923. This contact was followed shortly on December 8, with Connecticut’s 1MO contacting British station G2KF. It is significant to note that these contacts took place on 108 to 118 meters after attempts on 200 meters had failed.

양방향 통신을 기획하는 동안 이미 두껀의 양방향 통신이 기록됨에 따라 계획은 더욱 고양되었다. 첫번째 양방향 대서양횡단 교신은 코네티컷주의 1MO와 1XAM 그리고 프랑스의 8AB 사이에 1923년 11월 17일에 이뤄졌다. 이 교신에 곧이어 12월 8일에 코네티컷의 1MO거 영국의 G2KF와 교신이 성사되었다. 이 교신은 200미터 밴드에서 실패하고 108미터 밴드와 118미터 밴드 사이에서 이뤄 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됐다.

[단파대 사용이 장거리 무선통신에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계기가 됐다.]

The balance of the ’20s saw the Pan-American tests, the Franco-British tests, the Italian tests, the Australia-US tests, and the Commonwealth tests, as well as replays of previous tests. Continually improving technology brought reliable and consistent relays domestically. 

장거리 통신 뿐만 아니라 20년대의 지역 통신실험도 붐을 이루게 됐는데 범 미주대륙 실험, 프랑스-영국간 통신 실험, 이탈리아 실험, 호주-미국 실험, 영연방 실험들이 연이어 실시됐다. 지속적인 기술발전을 이뤄내며 국내적으로도 안정되고 신뢰할 만한 중계망을 구성할 수 있게됐다.

As amateurs began to recognize the potential of the shorter wavelengths and the understanding of propagation advanced, new records were established and international communication became increasingly frequent. Simultaneously, the interest in listening tests gave way to two-way transmitting tests which became more specific as to intent, region, mode, and wavelength — and consequently became more competitive.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단파 통신의 잠재력을 알아냈고 전파의 전파에 대한 이해를 진전시켜 새로운 기록들이 세워졌고 국제 통신이 활발해졌다. 수신실험에서 양방향 통신 실험으로 관심이 증가하는 동시에 통신의 목적, 지역, 방식 그리고 파장이 더욱 구체적이 되어갔고 결과적으로 단파 통신의 경쟁력이 증가했다.

[무작위로 송신하고 수신하는 실험이 아니라, 지역간 의도된 통신, 특정 주파수를 지정한 통신등 구체화 고도화 되기 시작했다.] 

The designation “test” evolved to “contest.” Contest inaugurations include Field Day in 1934, the International test in 1927, Sweepstakes in 1930, and the ARRL DX contest in 1932. Challenging tests spurred technological advances and were a cornerstone in the foundation of Amateur Radio and its enjoyment.

"실험(test)"라는 개념은 이제 "경쟁(contest)"으로 진화했다. 컨테스트(교신 경진대회)가 공식등장한 것은 1934년의 필드데이, 1927년 인터내셔널 테스트, 1930년의 스윕스테이크 그리고 1932년 ARRL DX 컨테스트 등이 시초다. 도전 실험(컨테스트 참여)은 통신기술 발전에 박차를 가했고 아마추어 무선의 기초를 다지고 즐기는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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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decade to come, Amateur Radio would continue to extend its limits — eventually aiding explorers in polar expeditions. An article about amateur involvement in polar expeditions is forthcoming in Q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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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W. Marinaro, WN1M, an ARRL member, was first licensed in 1952 as KN2CRH and has been licensed continuously ever since. He now holds an Amateur Extra class license.

Mike is the ARRL’s volunteer historian. You can reach him at PO Box 404, 250 Cold Brook Rd, South Glastonbury, CT 06073-0404 or by e-mail at wn1m@arr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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