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집] 2024년 5월, 꿈을 되살린다는 기분은 넘나 좋으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지요. 봄 꽃들이 화려하고 풍성한 열음을 기대하며 꽃들이 활짝 피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말 싯구가 생각 납니다.
"곶 됴코 여름 하나니"
텃밭에는 감자 꽃과 완두콩 꽃이 피고,
아침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푸성귀와 딸기, 겨울을 이기고 알이 여물어 가는 양파,
화려해져 가는 마당의 꽃밭
꽃 가꾸기의 마지막은 장미라는데 역시나 우아함과 향기는 단연 최고입니다.
5월 내내 마당에 달콤한 향기를 가득 채워준 토종 으아리. 그리고 피기 시작한 수국
그윽한 향의 작약
매혹적인 저먼 아이리스와 클레마티스
시원한 자리를 찾은 앵두와 꼬리의 앉은 자세가 사람 같아 한바탕 웃습니다.
20여년전 혈기 왕성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반도체 설계를 업종으로 삼아 사업을 했더랬습니다. 그래봐야 후배 몇을 데리고 학교 창업 보육센터에서 시작 했는데 거의 1인 기업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나중에 후배들 월급도 못주는 사태에 이르러 2년여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사장이라는 사람이 장사는 안하고 맨날 자기의 궁금증 푸느라 밤을 샜으니 폐업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 고생한 후배들을 생각하면 지금 생각해도 미안한 마음 가득 하네요.
그때 궁금 했던 것이 "FPGA 에뮬레이터"라는 것이었지요. 반도체 설계물의 검증장비인데 해외에서도 막 흥하던 분야이기도 했습니다. 반도체 설계물(Semiconductor IP)를 팔려면 검증여부를 물어오죠. 실제 반도체로 제작했다면 가장 좋은 주장이 되겠지만 한두푼으로 실현할 수 없습니다. 시뮬레이션 만으로는 고객을 설득하기 매우 어렵기에 FPGA를 써서 실제와 비슷한 작동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시스템의 일부분인 IP의 검증을 위해 FPGA 실행 보드를 제작하기는 사실 칩을 제작하는 것 만큼이나 지난한 작업이 됩니다. 그래서 시뮬레이션과 FPGA를 한데 엮어 검증하는 기법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던 시절입니다. 외국 회사와 대학의 논문과 기술문서들을 입수하여 밤새 들척이며 PSCE(Poorman's Standard Co-Emulator)라는 것을 개발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한창 메모리 반도체에 열을 올리고 한쪽에서 그나마 시스템 반도체를 키워야 한다는 말만 무성 했었죠. 그런 환경에서 "코-에뮬레이터(Co-Emulator)"는 사업종목으로 무리한 것이었습니다. 외국에서 몇번 전화가 온것 말고는 국내에서 이해는 커녕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궁금증과 꿈은 긴 숙면에 들어 갔습니다. 인터넷 저장소 Internet Archive에 그 시절 홈페이지가 보관되어 있군요. 다시 찾아보니 "감개무량" 하다는 말이 절로나옵니다.
https://web.archive.org/web/20020324043350/http://anslab.co.kr/
작년 여름부터 모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칠 일이 생겼더랬습니다. 그리고 마침 전자통신 연구소 ETRI에서 주도하여 학생들에게 칩을 제작해 주는 국가사업이 시작된다는 공고를 접하고 학생들을 독려하여 지원토록 했었습니다. 시골 촌부였다면 감히 손도 못내밀 일이었지만 "대학교수"라는 직함은 힘이 있더군요. 칩 제작 접수도 수월히 받아 주더군요. 게다가 20여년간 잠자고 있던 "반도체 설계 검증"의 본능이 깨어나는 계기가 될줄이야!
<지하은(경희대학교 4학년)이 설계한 칩. 공간이 남아서 그림을 넣어봤다.>
작년에 지원했던 학생들의 MPW 칩이 배포되어 테스트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학교에 칩 테스트 장비가 있을리 없으니 만들기로 하고 궁리하던 중 어둠속에 잠자던 "에뮬레이터"의 아이디어를 되살리게 됐습니다. 세월이 지난 만큼 FPGA와 설계도구에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고가라 감히 넘지 못할 장벽 이었던 시뮬레이터, 컴파일러와 합성기가 이제는 무료이거나 오픈-소스로 널리 활용되고 있고 말썽 많던 FPGA도 성능이 일취월장 한데다 아쉽던 규모도 확장되었습니다. 가격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싸졌구요.
고물상자를 뒤져 그시절 만들었던 보드를 꺼내 봤습니다. 저 PCI 보드를 제작하는데 PCB 설계만 500여만원, FPGA는 개당 100여만원. 돈이 없어서 겨우 외상으로 부탁하던 서럽던 기억이 되살아 나는군요. PSCE를 부활 시키며 예전에는 사업으로 봤기에 조급했던 안목이 훨씬 넓어졌고 완성도 또한 매우 높아졌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니 그때 만들었던 제품 아닌 제품은 조잡했다는 생각마저 드는군요.
그간 반도체 설계에 기여한 수많은 오픈-소스 개발자들 그리고 잠자고 있던 반도체 설계의 본능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어준 "내 칩 MPW" 사업과 그 관계자들이 너무나 고맙습니다. 그래서 뭐라도 하려고 개발 자료들을 깃-허브에 공개해 뒀습니다. 그렇다고 PSCE(Poorman's Standard Co-Emulator)를 세상 사람들이 이해해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세월이 지나 여러모로 여유를 가지게 된 지금 오랜 꿈을 되살리게 되었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좋습니다. 이 만족감이 조금 더 연장되길 기대합니다. 예전에 피었다가 진 꽃 마디에 이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열매가 맺히려나 보다 하고 있습니다. 사업이 아닌 교육으로 그리고 취미로 말이죠.
아! 그리고 이웃나라 중국의 전자산업도 저의 즐거움에 한몫 했다는 점을 밝혀야 되겠군요. 올해 들어 이런 저런 부품이며 측정기들을 구입 했는데 벌써 백여만원어치가 훨씬 넘습니다. 어떤 부품은 약간 조악하긴 하지만 대체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특히 Gowin의 FPGA는 기대 이상입니다.
부활한 반도체 설계자의 꿈이 비 개인 오월의 하늘처럼 전도양양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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