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집] 2023년 12월, 자연과 교감
'귀촌'이라 하면 떠올리는 단어는 텃밭일 겁니다. 봄에 씨를 뿌려 놓으면 지가 알아서 눈꼽만한 씨앗에서 파릇하게 올라오는 새싹들의 모습은 신비합니다. 봄 나물, 여름채소, 가을 배추 어느하나 경이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철마다 피는 꽃들은 또 어떻구요. 식물뿐만 아닙니다. 도시에 살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반려동물도 생겼습니다. 처음 내려왔을 때 마주친 길고양이는 쓰레기통이나 뜯는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고양이 입장에서 인간은 어쩌면 침입자 일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날 다친 새끼 고양이가 우리 마당에 서성이길래 안타까운 마음에 치료해 주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거실냥으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살이 되어 생일 파티까지 해주게 될 줄이야!
이 두녀석 덕에 시골 겨우살이의 무료함이 한결 가십니다. 택배 상자를 물어뜯고 방안 여기저기 털뭉치를 날려 놓는 탓에 잦은 청소기 돌리기가 귀찮습니다.
그따위 귀찮음 쯤이야 곤히 잠든 모습을 보면서 얻게되는 미소에 비할수는 없습니다. 요녀석들 탓에 청소를 자주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아침 식사때마다 한입 달라며 식탁 의자를 먼저 차지하고 있으니 집사는 서서 먹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커피포트를 업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으니 다행입니다.
거실에 두녀석 말고도 마당에 눌러사는 고양이도 있습니다. 앵두는 재작년에 새끼를 세마리 낳고는 함께 마당냥이로 지내는 중이고 시도때도 없이 사료를 탐내며 테라스까지 왔다가 발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녀석에겐 노랭이라는 이름마져 붙여 주게 됐습니다.
아침 마당을 노랫소리로 가득 채우는 텃새들을 위해 모이대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여름에는 벌레들을 잡느라 애용을 안하더니 요즘은 모이를 먹으러 옵니다.
낯을 익혔는지 마당에 나서면 보채기도 합니다. 땅콩을 손바닥에 놓고 팔을 뻗으면 날아와 앉습니다. 손바닥에 내려앉은 곤줄박이 발톱의 느낌은 너무나 앙증 맞습니다. 모이를 물고가기 전에 빤히 쳐다보는 두눈을 마주하면서 자연과 교감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송구영신의 기분을 한껏 내보자며 창가에 등을 달았더니 요 두녀석의 바깥구경 터가 되었군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달력의 빨간날은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습니다.
멀리사는 친구가 노지감귤을 보내와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학교 졸업이후 만나지도 못했지만 생각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생각에 귤맛보다 달콤하군요. 겨울 감기 처방에 좋다는 핑계를 대며 뱅쇼를 끓일 때도 넣었습니다.
이웃이 여수에 사는 지인이 보냈다며 석화를 나눠 주셨습니다. 간식으로 호떡을 굽기도 했구요. 이런 소소한 감동과 사건들이 도시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도 나가서 사먹었겠지요.
아마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일이 귀찮았을 겁니다. 시골에서는 반강제로 요리를 합니다. 요리하느라 피운 불에 집안 보온과 습도 조절이 덤으로 따라옵니다. 반찬 냄새는 오히려 사람 사는 집이라는 걸 말해주는 거잖아요. 배도 채울 수 있으니 일석삼조 입니다.
모처럼 서울로 나들이 갔다가 커피를 테이크 아웃 해왔습니다. 진한 커피를 즐기는 편이라 별로 맛이 없어서 남겨 뒀더니 책상 위에서 밤새 식어 버렸더군요. 멀리가서 사온 커피가 아까워서 데웠더니 서울 맛이 나는 겁니다. 그렇게 가끔 도시의 맛이 그리울 때가 있긴 합니다.
겨울답게 고드름이 달리고 2023년 마지막 날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연말이면 다사다난한 한해 였다고 말하지만 많은 일이 있긴 했어도 개인사에 '난'은 없었던것 같아 한해를 보내는 마음이 한결 편합니다. 새해가 그 어느때 보다도 기대됩니다. '반도체 설계'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은 공을 들였었지만 그만큼 아쉬움도 많았더랬습니다. 지난 십여년은 사실 다른쪽에 한눈을 팔았었구요. 우연히 기회가 닿아서 학교에 적을 두고 학생들과 '칩 만들기'를 하게 되었는데 '대학교수'라는 직함의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힘 닿는 만큼 한껏 누려보려고 합니다. 교재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구요[링크].
모두들 행복한 한 해였기를, 그리고 다시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해피 해피 !!
답글삭제넘의 일기 덕분에 한 해를 마무리 잘 해쑤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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